오랜만의 여유로운 휴일. 밖에 날씨는 너무나 좋아도, 오늘 하루는 집에서 푹 쉬면서 뒹굴뒹굴하기로, 나 자신에게 휴식을 주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나는 쉬래도 잘 쉬지도 못하는 바보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시간만 있다면 하고 싶은 것은 언제나 많았다. 서랍정리부터 시작해서 근본적으로 한 번 방을 뒤집어서 확 바꾸어버리고도 싶었고, 사두기만 하고 보지는 못한 한켠에 쌓인 책들도 보고 싶었다. 한정판으로 싸게 팔길래 질러버린 발레 DVD 세트도 보고 싶었고, 제대로 챙겨 보지도 못했던 지난 피겨 월드 영상들도 몰아 보고 싶었고, 바쁜 와중에도 마음의 오아시스로 챙겨 봤던 체조갈라쇼와 레아 살롱가 내한 공연의 감상문을 적고도 싶었다.
막상 그렇게도 원했던 혼자만의 시간이 왔는데, 아침부터 밥먹고 잤다 깼다만 반복 중이다. 이게 무슨 사태란 말인가-_-;; 뭔가 새콤한 걸 먹고 싶은데 바로 집앞에 나가기가 싫어서 포기한다. 아침 먹고 낮잠 두시간, 일어나서 멍하니 기계적으로 인터넷 클릭질, 그리고 점심, 또 낮잠, 그리고 또 일어나서 지금 클릭질에 할 일 없이 블로그 접속 중; 발레 DVD를 좀 꺼내서 뒤적거릴까 하다가 끈덕지게 2시간 앉아서 볼 생각하니 갑자기 피로해서 그것도 관뒀다. 그리고는 별 업데이트도 없는 똑같은 인터넷 사이트만 멍하니 반복 방문.
그 동안 이런저런 블로그에 적고 싶었던 쌓이고 쌓인 이야기들도 쓰기가 싫어서 이렇게 쓸데 없는 넋두리만 적고 있다. 무기력하다. 아 정말 시간만 나면 끝장나게 내 시간을 즐기려고 했는데. 그런 것도 못하는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역시 노는 것도 언제나 놀던 가락에서 이어져야지, 막상 시간이 나니 정말로 아무것도 하기 싫은 이 기분은 도대체 뭐래...-_-
요즘 남자친구와 서로의 고집의 끝을 바라보며 대립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촛불시위이다. 도대체가 나를 무슨 톡 건드리면 정말로 어머나, 하고 옆으로 풀썩 쓰러지는 하늘하늘 여인네로 아는지, 그도 아니라면 초딩으로 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나는 촛불시위 밤을 새서 함께 하고 싶다. 단 하루라도. 어차피 겁이 많아 최전방에서 물대포 맞고 닭장차 끌어내고 하지도 못한다. 그럴 힘도 떡대도 깡도 없다. 그저 촛불 들고 후방에서 조용히 내 의지를 보여주고, 그리고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5월 31일에는 함께 갔지만, 그 후로 미친 듯이 바빠 전혀 짬을 내지 못하고 있는 남자친구는 본인 없이는 나를 절대 촛불시위에 보내고 싶지 않은가보다. 6월 6일에는 매우 안전한 저녁 시간에 갔는데도 혼자 갔다고 전화로 잔뜩 말을 듣고, 10시 반까지는 무조건 현장을 뜨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러니 밤샘 촛불시위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설득, 협박, 회유, 애교 등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가지 말라고 해도 종종 흘려넘기고(...) 안전한 시간까지 시청, 광화문 쪽 평화로운 시위에 참가하곤 했지만, 정말 밤이라도 샜다가는 무서울 정도로 화낼 것 같아서 얌전히 집에 돌아왔다. 밤새기만 해봐, 하고 말하는 말투가 정말로 들어본 적도 없을 정도로 완강하고 험악하다. 아니 왜, 대체 왜, 나는 안전한 곳에 있을 거고, 혼자가 아니라 아는 사람들하고 뭉쳐 있을 건데ㅠㅠ;; 나말고도 여자들 많고, 나보다 훨씬 어리고 훨씬 약한 어린이들도 많은데; 아아, 그 사람들은 튼튼하니까 괜찮지만 나는 잘 다칠 거니까 안 된단다. 내 털털한 성격을 아는 친구들이 들으면 경기를 일으키며 기절할 만할 발언이다. 그 녀석들은 닭살이 돋아 손발이 오그라 들지도 모른다. 괜찮아, 넌 어디를 가도 살아남을 사람이야!라고 말할 거다. 이 세상에 오직 우리 부모님과 남자친구만 날 못 미덥게 보는 게 분명하다;; 대체 왜 그렇게 내가 다칠 거라고 확신을 하고 있는 거냐구ㅠㅠ; 내가 좀 작아서 만만해 보이는 지는 몰라도, 이래뵈도 이민가방 두 개에 백팩, 노트북을 혼자 옮기면서 미국을 여행했던 여자란 말이다...
아아, 밉다. 여전히 과제에 말라 죽어가며 학교에 짐싸들고 가서 먹고자고 하는 사람이랑 계속 신경전 하는 것도 미안한 노릇이긴 하지만, 6월 10일을 나의 디데이로 잡았다. 나는 역사를 목격하고 싶단 말이다. 황소보다 질기다는 심씨 남자친구의 고집과, 하고 싶은 것은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의 고집은 어떻게 타협을 볼 것인가. 아니, 애초에 타협점이 없으니 결론은 어떻게 날 것인가. 나의 치고 빠지기 전략은 저 옹고집 철옹성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크윽.
오빠 이거 보고 있어? 내가 이길 거라니깐! 나 안 죽는다고! 나 안 다쳐! 나 안 약해~!
여러분. 내 편 좀 들어주셈. ㅠ_ㅠ
아....배고파. 숙제에는 너무나 집중할 수 없어서, 조금만 쓰면 되는데도 시간은 엄청 질질 끌고 있고. 하여간 배고파 죽겠다. 빵만으로 배를 채운다는 게 말이 안되지. 그걸로 누구 배를 채우나. 그렇지만 집에 반찬이 너무 부실해서 먹기가 싫다 ㅠㅠ 난 정말 제대로 편식쟁이가 맞는 것 같다. 아 숙제 언제 끝내나. 빨리 끝내고 일찍 자서 체력 만땅으로 충전하고, 아침 일찍 과외하러 갔다가, 끝나고 남자친구랑 촛불시위 출동할 거다. 꼭 무언가라도 바뀌었으면 좋겠다. 모든 사람들의 염원이 꼬옥 이루어지기를.